그룹명/영화 이야기 30

너와나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이 이야기가 꿈이라면 하은의 꿈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미는 배에 탔고 하은은 배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이 따라가게 되는 건 세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꿈은 꾸는 사람의 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우리가 보는 세미는 사실 하은일 수 있다. 게다가 세미가 겪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그런 심증을 더욱 굳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하루동안 세미는 내내 절박한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은을 잃어버리고, 절박한 심정으로 하은의 속내를 궁금해 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떠돌아다니는 개의 주인을 찾아주고 절박한 심정으로 개를 찾은 주인의 마음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 절박함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히 딱 들어맞는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

다음 소희

추리물을 보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트릭 자체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수사과정 중에 탐정이 주변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부분을 특히 흥미롭게 보는 것 같다. 이때 탐정은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람이 평생 외면해왔거나 왜곡해왔던 삶의 중요한 어떤 부분을 직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때 인물의 드라마가 폭발한다. 추리물의 후반부에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건 흔한 일이다. 모든 추리물이 다 그런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사연이 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게 한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탐정은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냥 트릭을 풀고 범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겠지만 아주 많은 수의 탐정들이 굳이 이런 일들을 한다. 그러다 일이 더 꼬이는 한이 있..

브로커

오랜만에 극장에가서 영화를 봤다. 브로커. 아이유를 큰 화면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따뜻한 시선의 영화여서 더욱 좋았다 보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사람이 혼자서 극복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좁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적 안전망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제도적인 도움을 받지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도를 좀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야 필요가 있겠지만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장에서는 제도의 개선에 걸리는 지난한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당장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영화속 소영과 우성도 그렇다. 이들에게는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우연히 모이게 된 사람들이 이 역할을 수행하게 되..

다시 본 영화

오늘따라 목도 안 아프고 모기도 없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방 불은 끄고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놓으니 아늑하고 고요하다 방금 본 영화속 분위기랑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우겨보고 싶을정도이다 보통은 도시를 더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아주 옛날에 느꼈던 것 같은 그 이상한 적막함이 그리울 때도 있다 자연이 더 큰 곳에 깔리는 적막함은 도시에서 느끼는 적막함과는 뭔가 다르다 아예 자연속에 있는 걸 말하는 건 아니고 산속에 있는 펜션이라던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집이라던가 차소리가 아니라 벌레 소리나 바람소리 물흐르는 소리라든가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엠비언스로 깔리는 곳 들리는 소리만 다른 게 아니라 뭔가가 다르다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그냥 다르게 느껴진다라고 해야 맞는 거겠지만 무서운..

크루엘라

중반부에 크루엘라로 변했을 때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어차피 태생이 빌런이니 인물에 카리스마를 부여하기 위해 좀 더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굴 줄 알았는데 딱히 안 그래 보였던 것이다. 물론 좀 못되게 말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그래서 동료들이 크루엘라를 도와주는 게 끝까지 자발적인 것 처럼 보였는데 이게 참 재미있었던 것이다. 막나가는 친구를 그냥 놔두지 못해서 도와준다는 느낌? 그들은 한순간도 부하였던 적이 없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친구였던 것이다. 중간에 화가 난 동료들이 크루엘라에게 말한다. "너 계속 이런식으로 우리를 막대하면 앞으로 안 도와준다?" 크루엘라의 대답은 "그럼 도와주지마"였다. 여기에 대한 동료들의 반응은?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계속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영화 본 날

서울 아트시네마에 가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종로 3가역에 내려서 좀 걷다가 담배를 피울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좀 헤매다가 예매를 했다 이상한 영화였다 그래서 보러 가기로 한 거긴 한데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상했다 어쩌면 장기적으로는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보는 동안에는 조금씩 졸았다 꿈뻑 꿈뻑 했던 것이다. 뿌옇게 안개가 낀 것 같은 탁하고 우중충하지만 어딘가 멜랑콜리한 색감이 입혀진 야외장면들이 좋았던 것 같은데 보면서 즉각적으로 아 좋다라고 느꼈다기 보다는 보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른뒤에 기억에 남은 이미지가 그거였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어쩌면 내가 그 부분을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인데, 보는 동안에는 조금씩 졸았기 때문에 마치 끊어진 필름처럼 상영되었다 미스테리하다기 보다는 ..

지루한 영화

오늘은 복잡하고 산만하고 지루한 영화를 보았다 복잡하고 산만하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산만한 것이 매력인 영화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게 뭘까? 막 알고싶고 궁금해진다면 그것은 매력이다 무언가를 궁금해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궁금한나머지 두근두근 설레이기까지 한다면 그것만큼 큰 인생의 즐거움도 별로 없다 그러나 궁금하지 않다면 궁금하지 않은 복잡하고 산만한 영화를 봐야한다면 그건 피곤한 일이다 물론 어디에 궁금증을 느끼느냐 이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결국 모든 건 그냥 내 문제일 수도 있다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나랑 안 맞았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내 관심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없었다고 해서 그 영화가 나쁜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니 험담은 하지..

블루 아워

삶의 어떤 단락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 좋아한다. 어쩌면 내 삶에도 있을 수 있는 단락일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이름 붙인 단락을 하나의 작품으로 빚어내는 일. 역시 좋아한다. 그 작품이 영화라면 당연히 극장에 가서 보고 싶어진다. 블루 아워는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였다.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가서 본 건데도, 좋았다. 사실 기대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근데 '블루 아워'가 뭘까? 영화를 보니까 동트기 직전의 밤과 아침 사이에 낀 시간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밤과 아침의 경계랄까? 자주 인서트로 삽입되는 씨퀀스가 있는데, 어린 시절의 스나다(카호 배우)가 혼자서 뛰어다니면서 노는 씬이다. 너른 들판이 배경이고 시간 때는 물론 '블루 아워'이다...

이런저런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역사적인 사실을 역사책에 기록하는 건 어느정도 가치중립적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적어도 역사책에 등장하는 일이 곧바로 명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이완용은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예술작품을 '정전'으로 삼는 행위도 이런식으로 가치중립적일 수가 있을까?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그 작품을 만든 창작자는 자기 작품이 정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치중립적으로 받아들일까? '정전'이 된다는 건 학교에서 그 작품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꼭 그렇진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이 높아지긴 할 것이다) 그때, 뭘 가르치게 될까? 그 작품의 창작자가 저지른 잘못들을?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선생이 가르치는 것은 그냥 '역사'일 것이다. 이럼 아무런 문제도 없다. 아무런 곤란한 일도 ..